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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포답사/국내

서울 방학동 연산군묘 (사적 제362호)

 

오늘은 퇴근하고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방학동 연산군묘에 찾아가 보겠습니다.

이렇게 자기계발은 원래 퇴근하고 하는겁니다. 나 퇴근할 때 먼저가냐고 그러지마요! 

 

 

연산군(1476-1506)은 조선의 제 10대 임금입니다.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죠. 그는 7살에 세자로 책봉되어 19세 때 즉위하게 됩니다. 연산군은 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는데 실록에 실려있는 시가 130여편이나 될 정도로 시를 많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들 연산군 하면 방탕하고 타락한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연산군 즉위 초에는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아버지 성종때부터 내려오던 태평성대가 지속되던 시기였죠. 사치스러운 풍습을 막기 위해 금제절목(禁制節目)을 만들어 단속하기도 했으며,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생의 안정과 관료의 기강을 세우는데 이용했습니다. 또한 귀화한 여진족들을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으며,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는 사가독서제를 다시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세조 이래 세 임금의 국조보감을 편찬하여 후대 왕들의 제왕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습니다. 또한 종묘제도를 정비하고 상평창을 설치하는 등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은 물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 연산군 묘를 가기 위해서는 김수영 문학관을 거쳐서 갑니다. 원래 이쪽으로 가야 하는데 직진을 하고 말았음 > 

 

 < 까닭인 즉은 앞에 무덤을 보고 연산군묘인줄 알고 네 발로 달려가서 그러합니다 >

< 가보았더니 정의공주의 묘였습니다. 정의공주는 조선 세종의 둘째 딸입니다 >

< 좌측은 정의공주의 남편인 안맹담의 묘, 우측은 정의공주의 묘입니다. 앞에는 안맹담의 후손의 묘군요 >

 

< 이제 뒤돌아서 연산군의 묘로 가볼 차례입니다 >

 

그러나 연산군이 비뚤어지기 시작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외할머니였던 신씨에게 어머니가 폐출되어 죽게 된 경위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연산군은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기 시작하였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많은 사림들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을 탕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어머니를 제헌왕후라 추존하고 회묘(懷墓)라 불리던 어머니의 묘를 회릉(懷陵)이라 고쳐 성종의 능에 함께 제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 둘레길을 따라가다보면 연산군의 묘로 가는 입구가 있습니다 >

 

 < 좌측이 연산군의 묘, 우측이 연산군의 부인인 거창 신씨의 묘입니다 >

 

 < 뒤에서 바라본 연산군의 묘입니다 >

 

 <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 조씨의 묘입니다. 연산군의 묘가 생기기 이전부터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

 

< 연산군의 사위(좌)와 연산군의 딸(우)의 무덤입니다 >

 

결국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고, 강화도 서북쪽에 위치한 교동도라는 곳에서 위리안치 되었다가 병사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교동도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연산군 부인인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연산군의 묘를 이장해 줄 것을 요청하여 지금의 자리로 오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이 아마 이렇게 된 까닭 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어머니의 영향이 컸을꺼라 생각됩니다. 어린 나이에 생모의 잃은 것도 모자라 죽음의 전말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죠. 마지막으로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를 위해 지은 시를 마지막으로 적어봅니다.

 

 

어제 효사모에 나아가 어머님을 뵙고

술잔 올리며 눈물로 자리를 흠뻑 적셨네

간정한 정회는 그 끝이 없건만

영영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

 

- 연산군일기 8년 9월 5일 -